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1 운동 (문단 편집) == 개요 == >'''대한 독립 만세!'''[* 과거 [[한반도]]를 비롯한 동양 세계에서 [[만세|만세(萬歲)]]는 [[황제]]에게만 바칠 수 있는 최상의 경배 구호였다. 민간인들이 스스로 황제에 대한 경배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키려 하는 [[대한민국|공동체]]의 [[한국독립운동|독립과 자주를 바라는 뜻]]에서 만세를 부른 것은 '''[[조선|군주제]], 나아가 그 어떠한 [[일본 제국|폭압적 전제정]]과도 결별한 [[한민족]]의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린 바였다고 볼 수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__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__…''' >---- >[[대한민국 헌법#s-3.1|대한민국 헌법 전문]] 中 >'''우리는 [[삼일절|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민주주의|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대부분이 한자로 구성된 [[기미독립선언서]]를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여 발간한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의 첫 구절이다. 원문은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다. [[https://mn.kbs.co.kr/mobile/news/view.do?ncd=4148670|현대어 전문]]] > 3.1 운동은 3천 년간 이어진 [[봉건제|봉건]]통치를 종식시키고 '''[[민주공화국|민주국가]] 건립의 개시를 알리는 운동이었다.''' 3.1 운동은 [[일본 제국|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뒤엎고 '''[[대한민국]]의 건립을 알리는 운동이었다.''' > ---- > [[독립운동가]] [[조소앙]]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15&totalCount=15&itemId=ij&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13&levelId=ij_040_0020_01070&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A1%B0%EC%86%8C%EC%95%99+%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EA%B1%B4%EB%A6%BD&searchKeywordConjunction=AND|갱생의 태극기 아래서]] '''3.1 운동'''([[三]][[一]][[運]][[動]])은 [[1919년]] [[3월 1일]]부터 수 개월에 걸쳐 [[한반도]] 전역과 세계 각지의 [[한민족|한인]] 밀집 지역에서 시민 다수가 자발적으로 봉기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 제국]]의 [[일제강점기|한반도 강점]]에 대하여 [[저항권]]을 행사한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civil disobedience)이자 한민족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다. ''''3·1 독립선언', '3·1 혁명''''[* [[1940년대]]에서 [[1950년대]] 초반까지 사용된 표현이다. 원래 [[헌정사#s-4.1|제헌 헌법]] 전문에도 수록될 용어였으나 [[한국민주당]]에서 반대하여 지금과 같은 3.1 운동으로 어휘가 수정되었다. 다만 1950년 3.1절 표어로 ''''3.1 혁명정신으로 건국에 매진하자''''라는 구호가 사용되거나 정치단체로 '''3.1 혁명동지회''' 등이 창설되고 [[1959년]] 40주년 경축식에서는 33인 유족회에서 '''3.1 혁명 가요집'''을 발행하는 등 이후에도 종종 사용된 사례가 있다(출처: 3.1 혁명 95주년 기념 학술회의).], ''''3·1 독립만세운동', '기미 독립운동'''' 등으로 칭하기도 한다. '''[[2019년]] [[3월 1일]]에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참가자들은 '조선 독립 만세'라는 구호를 앞세워 [[일본 제국]]의 무단통치(武斷統治)를 거부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이는 민간과 지식인의 반향을 일으켜 대규모의 전국적 시위로 발전하였다. 시위가 끝난 뒤에도 그 열기는 꺼지지 않고 각종 후원회 및 시민단체가 결성되었고 민족 교육기관,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 등의 여성 독립운동 단체, [[의열단]] 등의 무장 [[레지스탕스]], [[독립군(한국)|독립군]]이 탄생했으며 종래에는 현대 한국의 모체(母體)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낳은 운동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계기이고[* 3·1 운동으로 이미 독립을 선언하였으므로 당연히 다음 수순으로 정부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들 임시정부를 통합하여 통합 임정을 꾸렸다.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서울|한성]]에서 기의(起義)한지 삼십유여일(三十有餘日)에''' 임시헌장을 제정한다"고 명시하여 3·1 운동이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헌법]]에도 계승하고 있음을 명시하기 때문에[*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혁명|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 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 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 평화와 인류 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1987년 10월 29일.]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3·1 운동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용한 [[대한민국 연호]]는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원년으로 삼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